나에게 이런 문제가 찾아 올 줄은 정말 몰랐었다.
썩 내켜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열심을 내었는데..
교회를 옮기고 말씀을 들으면서 영적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술에 물탄듯 맹숭맹숭하게 지내왔었는데..
말씀에 힘이 있고 권위가 있으니 그 말씀이 속에 들어가
요동을 치며 야단법석을 떨면서 발악을 한다.
주일 오후 성경공부 시간에 이 문제를 나눴는데..
이렇게 발악을 하며 본색을 들어내는 것이 오히려 감사하다고 하신다.
그게 더 빨리 깨닫고 돌아올 수 있는 길이라고.
난 여지껏 내 스스로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살아왔다.
뭐든지 내가 하는 것은 불행하고 갇혀 지내는 삶 뿐이였다고.
하지만 오늘 아침 출근하면서 남편이 던지는 한마디에 또 생각의 끈을 잡았다.
엄한섭실장 급여문제...
남자여서 그런지 남편은 체면을 굉장히 우선시 한다.
폼생폼사라고 뭐든지 앞에서 큰소리 쳐놓고 뒤로 빠지며 나한테 밀어 놓는다.
앞뒤 구별없이 그냥 그 기분에 좌지우지하고 듣는 귀 없이 자기 말만 한다.
누가 뭐라고 할라치면 자기가 먼저 치고 들어가 자기 말을 하고
다른 소리를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말고 자기말로 막으며 끝내 버린다.
자기 기준의 판단으로.
그게 항상 나에게는 숨막히는 답답함이었지만 내가 숨 한번 고르면 끝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지금껏 지내왔기에 내 한숨의 원인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나는 늘 새장안에 갇힌 새란 표현으로 구속된 나의 삶을 표현했고
새장밖의 남편은 자유로운 늑대로 여겼던것 같다.
정말이지 난 남편이 행복한 줄 알았다.
뭐든지 자기 멋대로 다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것은..
마음 먹은 것은 다 하고 남자로써 누리고 싶은것들 다 해 봤으니까.
그 속에서 행복한줄 알았다..
그래서 남편이 행복하다고 느낄수록 나는 더욱더 초라해졌고..
그러지 못하는 나는 늘 눈물이 마르지 않았고 답답했으며
그래서 어쩌면 그에게 더 집착 했는지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교회에 나가는 길이였고
토해내듯 내 속마음을 찬양에 담아 부를수 밖에 없었다.
그게 나에게는 유일한 해결책이고 내가 살 수 있는 호흡의 통로 였다.
교회 안에서의 나와 교회 밖에서의 내가 다르다고 표현하던 남편과 아이들.
교회에서는 천사인데 집에서는 악마같다는 표현.
그럴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오늘에서야 설명이 된다.
난 교회안에 있을때 편안하고 자유롭게 숨을 쉴 수가 있었고 쉼을 얻을 수 있었다.
마음이 진정되고 안전하단 생각과 나도 모르게 긴장의 끈을 놓으니까.
본연의 내 모습이 나왔던 것이였고 교회 밖으로 나오면 늘 세상적인 문제들.
감정들. 외적인 환경과 내가 전투를 치루듯 갑옷을 입고 싸워야 했으니까.
문득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까 어릴적 나의 생활과 모습들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5~6학년쯤으로 기억이 난다.
한창 만화영화 재미나게 봐야 하는데 교회종이 울려서 갈까 말까 고민하다
달려가고.. 주일학교 선생님들 보면서 나도 커서 주일학교 선생님해야지 하며
작은 꿈하나 키우면서 교회 안에서 행복해 하고 즐거워 했던..
자라면서 학교 근처 교회로 옮기며 그곳에서 중고등부 예배를 통해
자유로운 사고와 서로 교제하며 나누는 즐거움을 배웠고
성인이 되어 자취방 근처 교회 생활을 하며 청년들과 소통하며 섬기는..
봉사의 재미와 찬양의 즐거움을 맛보며 행복해 했다.
그런데 결혼과 동시에 찾아온 예배 생활의 시련은 말 그대로 광야 길이였다.
하루 하루가 피 튀기는 전쟁과 같이 늘 남편으로 인해서..
남편 때문에.. 남편이란 이름 앞에서.. 난 불안하고 초조하고 괴로웠다.
어릴적부터 혼자서 자라다 싶이 하며 자유롭게 성장했던 나는
남자의 습성과 남자의 사고를 잘 몰랐기에
울안에 갇힌 신세로 내 스스로를 가둬버리며 남편이 주는 먹이만 먹고
남편이 주는 물만 마시려고 했고 남편이 주는 웃음만 받으려고 했다.
거기에서부터 잘못된 나의 삶의 방향이 틀어졌던것 같다.
내가 내 안에 두어야 할 분을 비켜 놓고 다른 것으로 담으며 시작된 덫.
그게 함정이 였고 그게 문제였고 그게 나의 족쇄가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행복과 자유를 잃어버리며 예수보다는 남편이 좋았던것 같다.
남편이 아니면 안되었던 것 같다.
아니 엄마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고 은연중에 몸부림치며 남편에게 몰빵 했다.
어릴적 그 기억들이 남자란 존재를 늘 혐오하게 했으며 남자란 믿을수 없는 존재.
남자들은 다 그렇고 그런 똑같은 더러운 것들이란 생각으로
단 한명한테도 내 마음을 진심으로 줘 본 적이 없으니까.
남편한테 지금도 나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한다고 까지는 말 못한다.
그에게 필요한 장기를 내어 줄수는 있을지라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생각은 못해 본다.
그냥 내가 선택한 사람이란 선택으로 내 틀 안에 그가 있으니 내것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나한테 남자란 여자에게 아픔만 주고 상처만 주는 다 그렇고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남편이 참 불쌍하단 생각을 진심으로 해 보게 되었다.
남편의 기본은 참 선량하고 착하며 순수한 정이 많은 사람인데..
자기 자신을 남편 또한 나 만큼 사랑하지 못하고 있구나 싶다.
그 안에 생명이 없고 그 안에 채우고 채워도 채울수 없는 갈증이 있기에
세상적으로 남자들이 찾아 헤매는 것들 다 즐기며 그 갈증을 채우려고
그 공허함을 채우려고 누려봤지만 늘 헤갈되지 않는 갈증이였고..
지금도 그 갈증은.. 그 삶의 무게는 더 남편에게 가증되었을 테니까.
그런 남편의 마음에 그전에 듣던 말씀과 다른 진리의 말씀이 들어가려고 하자
잠잠하며 재밌게 놀고 먹던 어둠의 영들이 화들짝 놀라며 아우성을 친다.
그러다 보니 시비조로 나한테 교회 옮기더니 더 교회에 빠져서
교회에서 살려고 한다고 야단법석을 떤다.
지금 출석하는 교회 못 나가게 하려고 이사를 하자고 한다.
돈의 노예가 되어서 돈~!돈~! 하며
돈이 있어야 남들이 무시하지 않고 헌금도 하는 것이라고.
직원들이 우상이 되어서 직원들~!직원들~! 한다.
직원들 없으면 지금의 자기도 없는 것이라고.
거래처 친구들 결재 문제로 찾아 온다며 체면 문제를 들고 나온다.
쪽팔려서 못살겠다고.
집 정리해 다 정리하고 맘 편히 좀 일해 보자고.
자기가 살아온 인생길은 생각안하며 지금 담장 눈 앞에 있는
숨막히는 현실만 보면서 짜증을 낸다.
그렇게 도피해봤자 순간이고 또 현실은 목을 죄어 올텐데.
영적으로 참 불쌍하다.
영적으로 갈급한데.. 그 갈급함을 알지 못하게 가로 막고 있는
저 어둠의 영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대적하며 남편에게서 떠날 것을 선포한다.
난 남편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인줄 착각하며 부러워 했고 그가 참 많이 미웠다.
내말은 안들으려고 귀 막으면서 나가서 다른 사람들 말은 몇시간씩 들어주며
격려하며 다독이며 놀아주고 같이 섞여서 그런 시간을 보내는 남편이
정말로 밉고 싫고 부럽고 화가나고 따라 해 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는 절대로 나를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셨다.
광야길에서 구름기둥으로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셨듯이
나에게는 그 흔하디 흔한 술친구하나..나와 비슷한 환경의 친구들 하나
붙여주지 않으시며 모범적인 가정의 사람들과 교회안으로 들어가라고 인도 하셨다.
그리고는 편안하면 잊게 되는 예수님의 은혜를..실족하지 말라고
나를 가장 잘 아시고 나의 체질을 나보다 더 세심히 아시는 예수님은
지난날의 환경을 통하여 나에게 체험으로 주시며 내 마음에서 밀어버렸던
예수님의 이름을.. 그 사랑을.. 기억하며 찾고 회복하라고 하신다.
나와 남편. 내 아이.우리 가정이 회복하며 행복할 수 있는 길.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안에 있다.
그 생명 안에 있는 것이다.
내가 문제 였다는 말씀이..
내가 회복되면 다 된다는 그 말씀이..
이제는 무슨 말씀인지 알겠다.
행복한줄 알았던 남편은 불행했다.
그래서 그 불행을 잊고자 그렇게 세상적인 것으로 열정을 쏟았었다.
이제는...
그 마음을 돌이키고 예수님의 은혜를 진심으로 받을 시간이다.
내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그 말씀의 의미를..
남편이 정말 나로 인해 나의 십자가를 지며 걸어온 그 길이 감사하다.
이제는 미움이 아닌.. 따스한 시선으로 남편을 바라 본다.
그 인생을 사로잡았던 정체를 알게 되었으니 더욱 힘써 기도해야 하는
사명 또한 회복한 것이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아멘.
내가 불행한 자가 아니였다.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였다.
행복한줄 알았던 남편이 정말 불행한 자였다.
세리마태와 셀롯시몬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가 될 수 있었던 이유.
하나님의 나라는 폭력이나 무력이나 투쟁이 아닌 사랑이란 이름안에서
사랑으로 하나되어 사랑으로 섬기며 사랑으로 이루는 하나의 사랑왕국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내가 버려야 할 것 들이 있다.
세상에서 부여잡았고 움켜쥐었으며 놓지못했던것들을 내려 놓고 가야 한다.
내가 버려야할 요소들.
행복을 행복으로 알지 못하고 불행으로 치부하며 불행하게 지내왔던 시간.
내 안에 성령의 불길같은 바람이 불어 오듯이 내 삶도..
남편 안에도 성령의 바람이 불길같이 불어 회복될줄 믿는다.
진짜를 가지고도 가짜인줄 오해하며 살아왔던 시간.
나 편하자고.. 나 믿음생활하는데 편하게 하자고 남편을 일으켜 세우는게 아니라
진정으로 그 영혼을 위하고 그 영혼을 예비하시고 세우신 그 목적을 위해
남편이 일어서며 변화되어 섬기는 일꾼으로 비젼을 찾아 회복하길 기도한다.
한주동안 내 주신 과제 안에서 이렇게 생각의 막힌 담을 허물어 주시는 은혜에 감사합니다.
목사님 말씀대로 시험이란 말은 노아에게 적용되는 말이다.
평생 비 한번 보지 못하고 구경하지 못하며 비란 것도 모르는 노아에게
하늘에게 비가 내릴것이니 120년동안 배를 만들라는 명령이 시험이란 표현이 맞는 것이다.
내가 견디어 내야 하고 내가 이겨내야만 살 수 있고 치료되며 회복 될 수 있는 길.
내가 전인격적으로.. 개인적으로 예수를 만나야 하고 체험해야만 알 수 있는 영생의 길.
우리가 잠시 잠간 겪고 있는 힘들 일들을 시험이란 말로 표현하면 안된다는 말씀이 이해가 된다.
한주동안 내 주신 과제 안에서 이렇게 생각의 막힌 담을 허물어 주시는 은혜 감사합니다.
(더러운 이그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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